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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先人篇 】선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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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용(晋鎔) 1605(선조 38년)∼1663(현종 4년) 字는 진숙(晋叔), 경봉(景鳳)의 2남으로 25世이다. 1615년(광해군 7년)에 제주에 유배온 간옹(艮翁) 이익(李瀷)에게 수학하여 1634(인조 12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상경하여 성균관에 진학하고 1643(인조 21년) 숙녕전 참봉 제수 서사(肅寧殿參奉除授筮仕)(癸未) 後 귀향하여 1658(효종 9년)에 이회(李檜)가 이 지방의 목사(牧使)로 부임하여 위정(爲政)의 제일지침(第一指針)을 학문의 작흥(作興)에 두고 온갖 조례규범(條例規範)을 오로지 선생에게 자의(諮議)하였으며, 선생이 또한 찬동참여(贊同參與)하시어 논의(論議)하시니 상호부합(相互符合) 하였으므로 드디어 방침(方針)을 세워 좋은 기지(基地)을 복택(卜擇)하고(現五賢壇 자리) 학교를 創建하고 장수당(藏修堂)이라 편액(扁額)하였으니 서적(書籍)과 양곡(糧穀)을 저장(儲藏)하여 많은 인재의 과공(課工)을 권면(勸勉)한다는 의의(意義)에 연유(緣由)함이었다. 이로부터 학문이 진흥발기(振興勃起)하여 문교(文敎)가 널리 행하여져서 남방풍속(南邦風俗)이 일변(一變)하였다. 그 후 1831년에 목사(牧使) 이예연(李禮延)이 사림(士林)의 공론으로 영혜사(永惠祠)에 종향(從享)하였든바 1843년에 목사(牧使) 이원조(李源祚)가 명유(名儒)를 영혜사(永惠祠)에 종사(從祀)하는 것은 그 의의(意義)를 따지면 미안(未安)한 바가 있다하여 별도(別途)로 향현사(鄕賢祠)를 건립하고 고령곡득종(高齡谷得宗)과 더불어 병향( 享)하였던 것이다. 묘소(墓所)는 서귀포시 동홍리 대교동 해좌(亥坐) (참고문헌 : 司馬先生案, 續修三綱錄, 增補耽羅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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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 충(繼忠) 1463년(世祖9年)∼千戶 치남(致南)의 아들로 20世이다. 룡방록(龍榜錄)에 수록(收錄)되었으며, 예조정랑(禮曺正郞)을 역임하였음. 묘소(墓所)는 舊左邑 終達里境 尊玉伊 午坐 墓祭 : 음 3월 15일
▶ 계 융(繼隆) 1632년(仁祖10年)∼1690년(肅宗16年),59歲, 字는 무경(茂卿)이고 진사(進士) 진용(晋鎔)의 4남으로 26世이다. 1663년(顯宗4年) 사마시에 급제하고 이어 1670년(顯宗11年) 제주에 큰 흉년이 들었으므로 노정목사(盧錠牧使)는 그 비참한 상황을 이뢰어 조정(朝廷)에서는 구호곡과 선위어사(宣慰御使)로 홍문관부교리 이하(李夏)를 보내어 왔다. 그는 위령제(慰靈祭)를 지내고 孝子, 烈女를 발굴하여 정려하고 과장(科場)을 베풀었는데 이 때 계융(繼隆)과 그의 동생 계창(繼敞)이 취시(取試)되어 직부(直赴)하였다. 그는 1671년(顯宗12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벽사도찰방(碧沙道察訪) 예조정랑(禮曺正郞)을 역임하였다. 퇴관(退官) 후에는 고향에 돌아와서 귤림원장(橘林院長)으로 있으면서 교학(敎學)에 힘쓰셨다. 묘소(墓所)는 涯月邑 光令境 排漢伊 巳坐 (참고문헌 : 朝鮮王朝實錄 顯宗條 縉紳先生案 耽羅紀年)
▶ 계 창(繼敞) 1637년(仁祖15年)∼1699년(숙종25年), 63歲, 진사(進士) 진용(晋鎔)의 6남으로 26世이다. 계융(繼隆)의 동생이며 1670년(顯宗11年) 선위어사(宣慰御使) 이하(李夏)에 의하여 兄 계융(繼隆)과 나란히 문과에 취시(取試)되어 1671년(顯宗12年) 전시문과(殿試文科)에 같이 급제되었다. 벼슬은 1673년(顯宗14年)에 성균전적(成均典籍)을 역임하고 후에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서(敍)하였다. 묘소(墓所)는 奉盖境 浮雲七岳 亥坐 (참고문헌 : 朝鮮王朝實錄 顯宗條, 縉紳先生案 耽羅紀年)
▶ 계 흥(繼興) 1647년(仁祖25年)∼1701년(肅宗27年), 55歲, 字는 성경(盛卿), 치용(致鎔)의 2남으로 26世이고, 계융(繼隆)의 사촌이다. 효도와 우애가 남달리 두터웠는데 1675년(肅宗元年) 3月에 조정에서는 제주의 흉년을 구하고자 구호곡과 부호군(副護軍) 이선(李選)을 순무어사(巡撫御史)로 보내었다. 그는 폐막을 시정하도록 하고 과장(科場)을 설치하여 문과에 김계흥(金繼興), 고기종(高起宗)을 시취(試取)하여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토록 하였다. 1676년(肅宗2年) 정월 전시 문과(殿試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을 권지 성균관학론(權知 成均館學論)으로 있다가 학록학정박사(學錄學正博士)로 누진(累進)하고 후에 내첨시 주부(內瞻寺主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서(敍)하였다. 묘소(墓所)는 城山邑 始興境 斗山峯 先塋 右側 (참고문헌 : 朝鮮王朝實錄 肅宗條, 縉紳先生案 耽羅紀年)
▶ 계 중(繼重) 치용(致鎔)의 5남이고 계흥(繼興)의 동생이다. 1738년(肅宗14年)에 시재어사(試才御史) 이도원(李度遠)이 와서 시권(試券)을 거두어 돌아가서 과차(科次)하니 양덕후(梁德厚), 이수근(李壽根), 이구성(李九成)에게 문과에 사제(賜第)하고 계중(繼重)은 나이가 70이 지났으므로 역시 사제(賜第)하여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도록 하였다. 1739년(肅宗15年) 9월에 전시문과(殿試文科)에서 15명을 取하였는데 계중(繼重)은 나이가 77세였으므로 임금의 특명으로 六品職을 제수하라 하였으므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배수(拜受)하고 돌아왔다. 묘소(墓所)는 朝天邑 咸德上古與池 午坐
▶ 명 헌(命獻) 1714년(肅宗40年)∼1795년(正祖19年), 82歲, 字는 사충(士忠)이고 수직통정대부(壽職通政大夫) 장집(章緝)의 아들이다. 그는 호학능문(好學能文)하여 1782년(正祖6年)에 가승(家乘)을 정비하여 임인보(壬寅譜)를 편(編)하고 비로서 가계(家系)의 체통(體統)을 세웠다. 1794년(正祖18年)에 심락수(沈樂洙) 어사(御史)가 베픈 과장(科場)에 응시하였는데 시권(試券)을 상송(上送)하여 과차(科次)할 때 명헌(命獻)의 나이가 81세였으며 策에 차석(次席)이었으나 특별히 사제(賜第)하였다. 그러나 고령(高齡)으로 직부(直赴) 할 수 없음을 어사(御史)가 아뢰니 임금이 命하기를 대정현(大靜縣) 유생(儒生) 김명헌(金命獻)은 明年 급제자를 발표할 때 방미(榜尾)에 부기(附記)하고 화패(花牌)를 내려 보내어 창명(唱名)하게 하고 객사(客舍)의 뜰에서 숙배(肅拜)하게 하라 하였다. 그러나 창방(唱榜)하기 前에 사망하였으므로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증직(贈職)하였다.
▶ 유(柔) 1775년(英祖51年)∼1834년(純祖34年), 60歲, 字는 강중(剛仲)이고 진용(晋鎔)의 6世孫으로 상오(相五)의 3남이다. 그의 兄과 함께 호학박식(好學博識)하고 준매(俊邁)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쌍벽(雙碧)이라 稱하였다. 1825년(純祖25年)에 대정현정(大靜縣庭)에 전패(殿牌: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牌로 출장나온 관원이나 수령이 여기에 배례함)가 옮겨져 있음을 임고(任皐) 목사(牧使)가 아뢰니 경차관(敬差官)이 과장(科場)을 열고 시권(試券)을 거두어 상경(上京)하니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홍의준(洪義俊)에게 과차(科次)하도록 명하였다. 이 때 文科에 김유(金柔)와 武科에 박경신(朴景信)에게 사제(賜第)하여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도록 하였다. 김유(金柔)는 전시문과(殿試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고, 1833년(純祖33年)에는 대정현감(大靜縣監)으로 부임(赴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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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 무(繼武) 내용(乃鎔)의 장남으로 26世이다. 숙종(肅宗)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명월만호(明月萬戶)를 역임하고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에 이르렀다.
▶ 윤 위(胤胃) 1707년∼1800년, 94歲, 희우(喜雨)의 차남으로 28世이다. 재기과인(才器過人)하여 1723년(英祖3年) 武科에 급제하여 명월만호(明月萬戶)를 역임하였다.
▶ 용 우(用雨) 1707년∼1800년, 94歲, 첨정(僉正) 계무(繼武)의 차남으로 27世이다. 위인(爲人)이 걸연(傑然)하여 武科에 급제하여 천총(千摠)이 되었는데 후에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까지 지냈다. 눈이 호안(虎眼)같이 무서워 양정훈(梁廷勳), 부도일(夫道一), 신성흠(愼性欽), 이최(李最)와 함께 제주(濟州) 오호(五虎)의 한 사람이다.
▶ 기 성(基成) 1853년∼1931년, 79歲, 한동태생(漢東胎生)이며 경룡(鏡龍)의 장남으로 33世이다. 고종(高宗)시 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대정현감(大靜縣監)을 지내었다.
▶ 효 남(效男) 억령(億齡)의 장남으로 23世이다. 武科에 급제하여 절위장군(折衛將軍) 훈련원 봉사(訓練院奉事)를 지내었다.
▶ 여 성(汝聲) 1639년∼1699년, 61歲, 경(鏡)의 장남으로 25世이다. 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訓練院奉事)를 지내었다.
▶ 진 우(振雨) 계무(繼武)의 장남으로 27世이다. 武科에 급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지내었다.
▶ 국 보(國輔) 진우(振雨)의 차남으로 28世이다. 武科에 급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을 지내었다.
▶ 남 우(南雨) 1650년∼1724년, 75歲, 계징(繼徵)의 5남으로 27世이다. 武科에 급제하여 현신교위수훈련판관(顯信校尉守訓練判官) 증통정대부 (贈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
▶ 복 태(福泰) 1717년∼1765년, 49歲, 윤우(潤雨)의 장남으로 28世이다. 1739년 己未 武科에 급제하여 절위장군(折衛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 衛副護軍)을 지내었다.
▶ 광 종(光宗) 1736년∼1793년, 58歲, 복태(福泰)의 장남으로 29世이다. 1775년(正祖乙未) 武科에 급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행명월만호(行明月萬戶)를 지내었다.
▶ 창 석(昌錫) 택우(澤雨)의 장남으로 28世이다. 武科에 급제하였다.
▶ 수 성(壽成) 국보(國輔)의 3남으로 29世이다. 武科에 급제하였다.
▶ 윤 옥(潤玉) 1747년∼1823년, 77歲, 진태(鎭兌)의 장남으로 30世이다. 1778년(正祖2年) 武科에 급제하였다.
▶ 광 옥(光玉) 1749년∼1788년, 40歲, 진태(鎭兌)의 차남으로 1778년(正祖2年) 與兄 동방(同榜) 武科에 급제하였다.
▶ 승 열(承烈) 1829년∼1891년, 63歲, 경옥(鏡玉)의 장남으로 33世이다.武科에 급제하였다.
▶ 치 홍(致弘) 승현(承賢)의 장남으로 34世이다.武科에 급제하였다.
▶ 경 신(京伸) 복순(福順)의 장남으로 35世이다.武科에 급제하였다.
▶ 철 보(喆寶) 1812년∼1886년, 75歲, 광득(光得)의 차남으로 32世이다.武科에 급제하였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이다.
▶ 신 백(信伯) 1849년∼1895년, 47歲, 철록(喆祿)의 장남으로 33世이다.武科에 급제하였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 성 수(性洙) 1866∼ , 신천(信天)의 장남으로 34世이다.武科에 급제하였다.
▶ 명 현(明鉉) 1833년∼1918년, 86歲, 성진(聲振)의 장남으로 32世이다. 1882년 武科에 급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행용양위부사과(行龍 衛副司果) 辛丑 절충오위장(折衝五衛將) 가통정계(加通政階).
▶ 명 각(明珏) 1835년∼1918년, 84歲, 성진(聲振)의 차남으로 32世이다. 1882년 武科에 급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행용양위부사과(行龍 衛副司果) 辛丑 절충장군(折衝將軍) 壬寅 가통정계(加通政階).
▶ 영 우(泳佑) 1875년∼1897년, 23歲, 명현(明鉉)의 장남으로 33世이다. 1891년(辛卯) 武科에 급제하였다.
▶ 기 일(箕鎰) 1824년∼1837년, 광숙(光淑)의 장남으로 32世이다. 헌종 갑진(憲宗甲辰) 武科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 衛副護軍).
▶ 창 규(昌圭) 1847년∼1928년, 82歲, 기일(箕鎰)의 장남으로 33世이다.1891년(辛卯) 武科에 급제하였다.
▶ 기 현(沂鉉) 1847년∼1886년, 40歲, 경집(景集)의 차남으로 33世이다. 한학자이며 서예에서 해서(楷書)를 잘 썼으며, "賦"라는 文章에 능했다. 1875년(光緖12年)에 武科의 丙科에 합격.
▶ 좌 규(佐圭) 1850년∼1923년, 74歲, 기성(箕性)의 장남으로 33世이다. 1877년(丁丑) 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었다.
▶ 재 연(載璉) 1792년∼1875년, 84歲, 인보(仁寶)의 차남으로 32世이다. 1814년(甲戌) 武科에 급제하여 회방가자통정대부 (回榜加資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 衛副護軍).
▶ 덕 태(德泰) 순보(順寶)의 장남으로 32世이다.武科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을 지내었다.
▶ 맹 립(孟立) 1878년∼1948년, 71歲, 저지태생(楮旨胎生)이며 만석(萬碩)의 장남으로 34世이다. 武科에 급제하였다.
▶ 기 표(基杓) 1850년∼1907년, 58歲, 명역(明域)의 3남으로 34世이다.武科에 급제하였다.
▶ 병 로(炳潞) 1846년∼1899년, 54歲, 제주시 도평태생(都坪胎生)이며 계형(桂瀅)의 장남으로 35世이다.武科에 급제하였다.
▶ 운 룡(雲龍) 기손(基孫)의 장남으로 35世이다.武科에 급제하였다.
▶ 천 정(千錠) 문과 전적(文科典籍) 계중(繼重)의 장남으로 27世이다.武科에 급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권지훈련참군 (權知訓練參軍)을 지내었다.
▶ 광 우(光雨) 1779년∼1838년, 60歲, 안덕면 사계태생(沙溪胎生)이며 명철(明喆)의 장남으로 32世이다. 1814년(純祖14年, 甲戌) 36歲에 武科의 丙科에 급제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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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 하(容河) 1896∼ ? 북제주군 애월읍 하귀 학원태생(鶴園胎生)이며 향교문묘직원(鄕校文廟直員) 상수(庠洙)의 장남으로 35世이다. 서예가이며 교육자로서 字는 달우(達宇) 호는 우당(愚堂), 경성제대(京城帝大)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 1945년 8월 광복후 대구사범대학 초대학장을 지내시고 그 후 문교부 수석장학관과 용산 고등학교장, 경기사범학교장, 서울상대 교수 등을 역임하다가 1949년 4월 제4대 제주도지사로 부임, 4·3사건 이재민을 구휼(救恤)하고, 이 고장 교육진흥에 각별한 노력을 경주(傾注)하였다. 1950년 6.25사변때 서울에서 납북되어 애닲다 아니 할 수 없다. 부인인 전인항(全仁恒)여사는 이화여전 보육과 출신으로 교육에 종사한 바 있다. (참고문헌 : 濟州道誌) 乙未譜 5卷 93頁
▶ 창 희(昌禧) 1893년∼1952년, 60歲, 제주시태생(濟州市胎生)이며 두옥(斗玉)의 장남으로 36世이다. 해방후 치안관(治安官) 및 초대 제주경찰서장을 역임했으며 문중사(門中事)에도 많은 관심이 있어 후진들에게 조언(助言)을 아끼지 않았다.
▶ 봉 구(鳳九) 1865년∼1947년, 83歲, 서호태생(西好胎生)이며 유관(柔觀)의 장남으로 33世이다. 향교도훈장(鄕校都訓長)과 풍헌(風憲) 등을 지내면서 문중의 제반사에 참여 후진양성에 주력했음. 제주도종친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대종중도유사인 黃洙가 그의 直孫이다.
▶ 순 경(順京) 1893년∼1970년, 78歲, 제주도 북군 구좌읍 평대태생(坪垈胎生)이며 치관(致寬)의 3남으로 33世이다. 1917년 제주농고를 졸업하고 행정직에 근무하다가 1922년 서귀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출발, 신도(新桃), 창천국민학교장을 거쳐 신례국민학교장 때 정년퇴임(58, 2, 26) (참고문헌 : 濟州敎育史)
▶ 병 형(秉瀅) 1898년∼1975년, 78歲, 제주도 북군 광령태생(光令胎生)이며 석주(碩柱)의 장남으로 36世이다. 교편생활과 제주도종친회 고문을 역임한 바 있음.
▶ 창 오(昌五) 1888∼ ? 하도태생(下道胎生)이며 종해(宗海)의 장남으로 31世이다. 해방후 구좌면장(1945∼1946)을 2년간 역임하였으며 평대교(坪垈校) 교사 태표(泰杓)가 그의 3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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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 헌(命獻) 1714년∼1795년, 82歲, 수직(壽職) 통정대부(通政大夫) 장집(章緝)의 子로서 27世이다. 호학능문(好學能文)하였으며 1782년(正祖6年)에 相五氏와 더불어 임인보(壬寅譜)를 편찬하여 보급한 바 있다.
▶ 상 오(相五) 1745년∼1825년, 81歲, 한경면 조수태생(造水胎生)이며 형택(亨澤)의 장남으로 30世이다. 호조참판(戶曹參判) 명헌(命獻)과 더불어 임인보(壬寅譜)를 편찬하여 보급한 바 있으며 슬하에 6남을 두었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낸 유(柔)는 그의 3남이다.
▶ 기 억(基億) 1787년∼1856년), 70歲, 제주시 이호태생(梨湖胎生)이며 현경(賢慶)의 5남으로 31世이다. 字는 영숙(永淑), 임인보(壬寅譜)시 미확인 양대휘자(兩代諱字) (堅老致南)을 憲宗丁未 1847년 (후손기억고호적시위등록(後孫基億考戶籍始爲登錄)으로 계보(系譜)를 밝히는데 공이 컸다.
▶ 재 수(載洙) 1836년∼1890년, 55歲, 제주시 이호태생(梨湖胎生)이며, 한진(漢鎭)의 장남으로 33世이다. 字는 도연(道淵), 호는 률포(橘圃), 그는 의범(義範(32世)과 더불어 계사수필보(癸巳手筆譜)를 편찬하던 中 별세하였으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3년후에 유향좌수(留鄕座首) 기휴(基休(34世)가 계승 발간한 것이 계사보(癸巳譜(1893)이다.
▶ 기 휴(基休) 1837년∼1911년, 75歲, 제주시 명도암 태생(明道岩胎生)이며 상현(祥顯)의 장남으로 34世이다. 字는 원영(元永), 풍채준발명중당세(風采俊發名重當世) 통정(通政)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세칭(世稱), 명도암(明道岩) 김좌수(金座首)라 불렀다. 계사보(癸巳譜: 1893年)를 발간 보급한 분이다. 제주대학교 교수 김수현(金洙賢: 理學博士)이 그의 5代孫이다.
▶ 기 섭(基燮) 1868년∼1940년, 73歲, 애월읍 동귀태생(東貴胎生)이며 치홍(致弘)의 차남으로 33世이다. 애월풍헌(涯月風憲)을 지냈으며 사재(私財)로 제주향교 外 을 重修한 바 있으며, 상수(庠洙), 기문(基汶) 宗人과 더불어 임술보(壬戌譜: 1922年)를 편찬 발간 계해년(癸亥年: 1923年)에 이르러 비로소 합보(合譜)할 수 있었다. 효행이 남과 달랐으며 儒學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시종일관 和와 信으로 종가(宗家)의 수범(垂範)이 되었다. 다호(多好)에 살았으므로 多好金風憲이라 稱하였다. 계리사(計理士)였던 달관(達寬)이 그의 장남이다.
▶ 봉 오(鳳五) 1889년∼1973년, 85歲, 서귀포시 호근동 태생(好近洞胎生)이며 유흡(柔洽)의 장남으로 33世이다. 호근동에서 이장직을 4회에 걸쳐 역임한 里行政家이며 한학자이다. 숭조상문(崇祖尙門)에 투철하여 항상 一家일에 헌신하여 추앙(推仰)을 받았다. 子에 남종(南鍾)이며 장손이 광하(光河)이다.
▶ 우 남(祐男) 1893년∼1982년, 90歲, 서귀포시 서호동 태생(西好洞胎生)이며 명오(鳴五)의 장남으로 34世이다. 서호동 이장직을 역임했고 충직 정명(忠直正明)한 유학자의 길을 걸으셨던 분으로 마을 일이나 一家일을 지도했던 원로이셨다. 曾孫에 찬국(燦國)과 찬조(燦兆)가 있다.
▶ 기 문(基汶) 1863년∼1937년, 75歲, 제주시 명도암 태생(明道岩胎生)이며 상형(祥亨)의 차남으로 34世이다. 字는 윤약(允若) 호는 담헌우월천(潭軒又月泉), 1902년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1906년에 가통정(加通正)을 서(敍)했다. 남성상사 대표 영식(鈴植)이 그의 曾孫이다.
▶ 준 현(俊鉉)(一名 志) 1835년∼1896년, 62歲, 애월읍 하귀 태생(下貴胎生)이며, 문환(文煥)의 장남으로 32世이다. 1894년(甲午)에 進士, 그는 세칭(金進士亂)의 張本人이다. 송귀호 목사(宋龜浩牧使)와 그 뒤를 이어 1890년 4월에 도임(到任)한 조균하 목사(趙均夏牧使)는 둘 다 탐관오사(貪官汚史)로 민관의 재화(財貨)를 갈취하는데만 급급하였을 뿐 민생을 도모하는 정사(政事)에는 뜻이 없었다. 홍수와 흉년, 호렬자(虎列刺)가 만연 그리고 부역(賦役)의 되풀이 등 오랫동안 비참한 상황속에서 살아온 농민들은 가난과 기아(饑餓)로 더욱 곤궁(困窮)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 때 애월읍 하귀리 출신 김지(金志)가 민중을 움직여 제주성(濟州城)을 점거하고 관아(官衙)를 파괴(破壞)하는 한편 민원(民願)대상이 되었던 관리(官吏)들을 추방(追放)하였다. (참고문헌 : 濟州道誌) (己未譜 5卷 149頁)
▶ 상 호(相浩) 1889년∼1965년, 77歲, 구좌읍 세화태생(細花胎生)이며 성추(聲秋)의 장남으로 34世이다. 일제말기 이른바 (創氏)를 강요당하자 종족(宗族)의 보존을 위하여 석익(錫翼), 달관(達寬)과 더불어 총무를 맡고 임인보(壬寅譜: 1942年)를 편찬 보급했다.
▶ 용 구(容九) 1877년∼1948년, 72歲, 광령 태생(光令胎生)이며 기현(基玹)의 장남으로 35世이다. 字는 성칙(聖則) 도유사를 지내면서 종친화합의 계기를 마련했다.
▶ 대 휴(大休) 1885년∼1961년, 77歲, 한동 태생(漢東胎生)이며 일호(日豪)의 차남이다. 字는 계방(季邦), 20여년간을 한동(漢東)이장을 지내어 마을에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문중(門中) 도유사(都有司)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직손의 자택은 13代를 살아온 고색(古色) 창연한 옛 집으로 향현공(鄕賢公) 명도(明道) 선생 진현(晋鉉)도 이 집에서 태어났다 하여 이름이 있다. 서귀포등기소장 김균항(金均恒)이 그의 직손이다.
▶ 용 삼(容三) 1873년∼1948년, 조수 태생(造水胎生)이며 병수(柄洙)의 장남으로 35世이다. 도유사를 지냈으며 조수교(造水校)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 치 삼(致三) 1892년∼1974년, 83歲, 법환 태생(法還胎生)이며 봉구(鳳九)의 차남으로 34世이다. 문중(門中)의 발전을 위해 항상 심혈을 경주(傾注)하였으며 고문직 등을 역임한 바 있다.
▶ 태 순(泰純) 1869년∼1941년, 73歲, 호는 국사(菊史) 상예 태생(上猊胎生)이며 택문(澤文)의 장남으로 34世이다. 도유사를 지내면서 종사(宗事)에 주력하였다. 종근(宗根)이 그의 직손이다.
▶ 석 영(錫英) 1897년∼1972년, 76歲, 제주시 태생(濟州市胎生)이며 창규(昌圭)의 4남으로 34세이다. 도유사를 역임하였으며 정유보(丁酉譜) 발간시 외무(外務)를 맡고 종친사업(宗親事業)을 전개하였으며 제주소방서장도 역임한 바 있다.言論人인 진수(鎭洙), 용수(瑢洙)가 그의 아들이다.
▶ 정 언(廷彦) 1892년∼ 곽지 태생(郭支胎生)이며 재천(在天)의 장남으로 35世이다. 제주도종친회 고문을 역임하였으며 한학에 조예가 깊었었다. | |
6. 독립운동(獨立運動) 및 애국지사(愛國志士) | |
▶ 석 윤(錫允) 1877년∼1949년, 73歲, 字는 근수(謹受(一名 鍾華) 호는 석황(石惶), 제주시 태생(濟州市胎生)이며 창규(昌圭)의 장남으로 34世이다. 고종(高宗)의 퇴위(退位)와 군대의 해산에 이어 식민지화(植民地化) 정책을 펴는 일제침략의 음모가 드러나자 동지(同志) 고사훈(高仕訓), 노상옥(盧尙玉), 김만석(金萬石) 등과 더불어 제주에서 항일의병(抗日義兵)을 일으켰다. 1908년 일찍이 전남 장성의 의병장(義兵將) 기삼연(奇三衍) 등과 긴밀히 연락을 취해오다가 이곳 제주도내에 있는 왜군과 왜병을 몰아내기로 결의하고 동지들을 규합 그 해 비밀리에 제주 광양(光陽)에 대장간을 차려놓고 무기를 준비하는 한편 의병을 모집하여 황사평(黃蛇坪)에서 훈련을 시켰다. 석윤(錫允)은 당시 의병(義兵)의 총수(總帥)로서 1909년 2월에 전도적(全道的) 거사(擧事)를 도모코자 현지에 주둔한 일군(日軍) 수비병(守備兵)과 혈전을 준비하던 중 제주성내 의병은 대정지방(大靜地方)에 모병차(募兵次) 나갔던 고사훈(高仕訓), 김만석(金萬石) 등이 일본관헌(日本官憲)에 체포되어 순국(殉國)하는 비운(悲運)을 맞이함으로써 비록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이 지방 항일운동사(抗日運動史)에 찬란한 이름을 남겼다. 이 사건으로 체포(逮捕)되었던 그는 심한 고문(拷問)과 회심(回心)을 종용(慫慂) 받았으나 끝까지 일본침략의 부당성과 호국운동(護國運動)의 정당성을 주장하다가 광주형무소 및 대구형무소에서 옥고(獄苦)를 치루었다. 출옥후에도 계속 기치(旗幟)를 높이 들어 구국항쟁(救國抗爭)의 뜻을 굽히지 않고 유생(儒生)으로서의 후진교학(後進敎學)에 힘쓰면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항일(抗日)의 화신(化身)으로 일관(一貫) 오로지 외길을 걸어 구국의 일념으로 투쟁하다가 수차에 걸쳐 투옥되는등 일생을 감시와 투옥이라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또한 한말(韓末) 제주의병(濟州義兵)들의 충의(忠義)를 기려 사라봉(紗羅峰) 모충사(慕忠祠)에 義兵抗爭紀念塔을 세워 애국(愛國)의 귀감으로 모시고 있다. (참고문헌 : 濟州道誌, 濟州先賢誌)
◈ 좌겸(佐謙) 병로(炳潞), 병구(炳龜), 석익(錫翼) (朝雪臺 12光復義士 中) ◈ 구한말(舊韓末)에 태어난 한학자이며 유림(儒林)의 수반(首班)들로서 조선국(朝鮮國)의 경술년(庚戌年) 합방(合邦)을 통탄(痛嘆)한 나머지 진옹(震翁) 이응호(李膺鎬) 등 12인이 집의계(集義契)를 조직하여 장성(長城)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문연서숙(文淵書塾)에서 후진유림(後進儒林)의 교학(敎學)을 통한 항일광복정신을 고취 앙양시키고 국상(國喪)때 망곡(望哭)터인 제주시 오라 연미동 암벽(岩壁)에 "조설대(朝雪臺)"라 음각(陰刻)하여 항일광복의 집념을 불태웠다. 기미년(己未年) 3월에는 집의계(集義契)의 광복지사 12인의 주동(主動)하에 유림을 위시한 원근주민 다수가 조설대에서 운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다가 왜경(倭警)의 추적을 당한 바 있다. 현지에는 조설대비(朝雪臺碑), 대한광복의사비(大韓光復義士碑), 집의계광복의사(集義契光復義士) 경모비(敬慕碑) 등이 있고 3·1절에는 문연사(文淵祠)에서 향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 濟州百年史)
▶ 좌 겸(佐謙) 1851년∼1938년, 88歲, 한경면 판포 태생(板浦胎生)이며 계현(季賢)의 차남으로 33世이다. 文科에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낸 유(柔)의 자손(子孫)이며, 조설대(朝雪臺) 12義士의 한 분이다. (참고문헌 : 濟州敎育史, 己未譜 5卷 117頁)
▶ 병 로(炳潞) 1865년∼1946년, 82歲, 제주시 이호 태생(梨湖胎生)이며 字는 희문(希文), 이환(利桓)의 장남으로 35世이다. 조설대(朝雪臺) 12義士의 한 분이다. (참고문헌 : 濟州敎育史, 己未譜 4卷 179頁)
▶ 병 구(炳龜) 제주시 도평 태생(都坪胎生)으로 字는 자옥(子玉) 호는 연수(蓮 ), 은암(隱庵) 계담(桂淡)의 子로서 35世이다. 구한말(舊韓末) 명월진장(明月鎭將)과 조천진장(朝天鎭將)을 역임했고, 제주향교훈장을 지낸 한학자로서 향공진사(鄕貢進士)이다. 성추소설(省楸掃雪)로 효명(孝名)이 높으며 조설대9朝雪臺) 12義士中의 한 사람인바 제주도종친회장을 역임한 재은(在殷)이 그의 차남이다. 묘소(墓所)는 제주시 내도동 199번지 (참고문헌 : 濟州道敎育史, 濟州百年史, 典故文獻)
▶ 석 익(錫翼) 1886년∼1956년, 71歲, 제주시 태생이며 창규(昌圭)의 차남으로 34世이다. 字는 홍점(鴻漸), 호는 심재(心齋), 독립지사인 석윤(錫允)의 아우이며 조설대(朝雪臺) 12義士의 한 분인 한학자(漢學者)임과 동시(同時)에 서예가(書藝家)이며 문장가(文章家)이고 사학자(史學者)이다. 일제침략에 의한 망국의 한을 품고 (耽羅紀年)을 저술했고, 일제의 창씨강권(創氏强勸)을 면해보고져 임인보(壬寅譜: 1942년)을 발간하게 되니 그 주무(主務)를 맡고 편찬 보급시킨바 있다. (참고문헌 : 濟州道敎育史, 濟州道誌, 耽羅文獻集, 乙未譜 6卷 50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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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인물가운데 효행(孝行)이 뛰어난 사람은 낙향(落鄕) 15세인 광숙(光淑)과 재명(才明)을 들만하다. 광숙은 正祖朝에 재명은 純祖朝에 각각 그 孝行이 뛰어나 조선환승현(朝鮮環勝賢)과 속수삼강록(續修三綱錄)에 효자정려(孝子旌閭)로 수록되었다.
▶ 광 숙(光淑) 1796년∼1869년, 74歲, 제주시 태생이며 상빈(尙斌)의 장남으로 31世이다. 제주목에 살았는데 성품이 지효(至孝)하여 새롭고 진미(珍味)한 음식을 보면 먼저 먹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상빈(尙斌)이 남의 모함으로 죽음을 당하였으므로 광숙(光淑)은 평생 분통히 여겨 남과 웃으며 말하는 일이 없고, 눈물 마른날이 없었다. 純祖20年(1820)에 신문고(申聞鼓)를 울려서 그 한(恨)을 풀었다. 어머니 申氏가 늙어서 음식을 씹지 못하니 매양 죽을 지어 드렸고, 병이 나서 눕자 2년동안을 옷을 벗지 못한채 밤 낮으로 극진히 간호하여 변을 맛보며 하늘에 기원하였다. 임종을 하게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니 2개월을 소생(蘇生)하였다가 돌아갔다. 제주목사가 이 사실을 아뢰어 哲宗11年(1860)에 정표(旌表)되었다. 1836年(憲宗丙申) 武科,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참고문헌 : 續修三綱錄, 耽羅紀年, 增補耽羅誌, 濟州忠孝烈誌)
▶ 재 명(才明) 光山人인데 아버지 여빈(汝彬)이 불행하게 표해중(漂海中) 죽었으므로 의주(義州)까지 3천리 길을 재명(才明)이 13歲의 나이로 그의 어머니 高氏와 함께 가서 운구(運柩)하여다 장사(葬事)지내니 高宗2年(1865) 양헌수 목사가 아뢰어 정표(旌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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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빈(光斌)의 妻 김씨(金氏) 광빈(光斌: 1799년∼1821년, 23歲)서귀포시 호근 태생이며 석심(碩深)의 차남으로 30世이다. 配 열녀(烈女) 김씨는 경주김씨(慶州金氏) 덕대(德臺)의 딸로서 호근(好近) 김광빈(金光斌)에게 출가 남매를 낳았는데 얼마 없어서 남편이 죽어버렸다. 아들 종복(鍾福)은 세 살이고 딸은 젖먹이었는데 장사(葬事)를 필한 후에 23세의 나이로 자결하니 남편과 같이 묻고 純祖22年(1822)에 임금께 아뢰어 정표(旌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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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유교(儒敎)
▶ 상 수(庠洙) 1871년∼1926년, 56歲, 북제주군 애월읍 하귀 태생이며, 치경(致慶)의 장남으로 34世이다. 字는 공서(公序), 호는 학암(學庵), 한학자(漢學者)로서 제주향교(濟州鄕校) 문묘(文廟) 직원(直員), 제주도 제4대 도지사를 지낸 용하(容河)가 그의 장남이다. (濟州鄕校沿革)
▶ 병 주(秉柱) 1878년∼1952년, 75歲, 남제주군 남원면 신흥 태생이며 기구(基求)의 장남으로 33世이다. 정의향교(旌義鄕校) 문묘(文廟) 직원(直員)과 남원면장(1923∼1937)을 역임. (旌義鄕校沿革)
▶ 형 진(亨鎭) 1867년∼1921년, 55歲, 제주시 명도암 태생이며, 유향좌수(留鄕座首) 기휴(基休)(세칭 明道岩金座首)의 장남으로 35世이다. 字는 차정(次貞), 제주향교(濟州鄕校) 문묘(文廟) 직원(直員) 역임. 제주대학교 부교수 김수현(金洙賢)의 증조부(曾祖父)이다. (濟州鄕校沿革).
▶ 익 수(翊洙) 1874년∼1963년, 90歲, 북제주군 애월읍 하귀 태생이며, 재기(在基)의 장남으로 34世이다. 제주향교(濟州鄕校) 문묘(文廟) 직원(直員)과 일신학교 초대교장(1922년) 역임 (濟州鄕校沿革, 濟州敎育史)
▶ 호 상(虎相) 1875년∼1943년, 69歲, 제주시 이호 태생이며, 재수(載洙)의 6남으로 34世이다. 字는 경소(景召) 호는 송운(松雲), 개명 기창(基彰), 한학자(漢學者)로서 제주향교(濟州鄕校) 강사(講師) 역임. 1933년에 전북 옥구면에서 상평리로 이거(濟州鄕校沿革)
▶ 현 수(賢洙)(一名 箕祥) 1891년∼1970년, 80歲, 북제주군 애월읍 하귀 태생이며, 영환(永煥)의 3남으로 34世이다. 字는 성모(聖模), 호는 송산(松山), 제주향교(濟州鄕校) 경학강사(經學講師)를 역임하였으며, 정유보(丁酉譜: 1957년) 발간시 교정(校正)을 담당했던 한학자(漢學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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